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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키다리아저씨 [2007.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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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과미래  16-07-13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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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8.27

이주원

 

삶을 불편하게 한다. 사람을 비참하게도 만든다. 이것을 벗어나야 할 아이들에게 이것은 오히려 장애로 작용한다. 너무 심각하여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자발적으로 선택하겠다고 한다. 

 

이것은 무엇일까? 

 

첫 문장부터 눈치 채셨을 것이다. 이것은 가난이다. 전부터 가난이라는 말을 듣거나 할 때마다 찹찹한 마음부터 앞섰다. 어릴 적부터 가난했다. 가난은 날 불편하게 했고, 마음을 위축시켜 어디서도 기죽어 지내게 했으며, 자주 조절할 수 없는 분노를 치밀게도 하였다. 당연히 벗어나고 싶었다. 탈출 방법은? 

 

가난한 집 아이에 가난을 벗어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공부’였다.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공부’를 탁월하게 잘하지 못했다. 관심도 없었지만…. ‘학벌’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질풍노도 시기의 ‘나는’ 그 길을 가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막연하게 이 길은 내 길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렇다고 ‘노는 아이’도 아니었다. 호기심으로 담배도 피고 술을 입에 대기는 했지만 ‘노는 것은’ 내 삶이 아니라고 생각했다.(지금은 골초에 주당이지만…) 어둠의 세계에 몸담기에는 아마 쑥맥이 아니었나 싶다. 

 

노점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홀어머니의 장남이었던, 그 가난했던 집의 아들이었던 나는 공부나 노는 것보다는 종교와 상상(꿈), 변화의 세계를 열망하는 열정에 심취해 있었다. 성적대신 신앙이 있었고, 물질적 쾌락대신 정신적 상상력(미래에 대한 꿈)이 있었으며, 빈곤대신 막연하나마 세상은 바뀌어야하며 그 길이 서고 싶다는 열정이 나에겐 있었다. 정서적으로 예민했던 그 시기 한 가난한 소년은 신앙과 상상력, 변화의 열정으로 가난이 몰고 오는 파국이 보이는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 

 

부의 양극화가 점점 깊어져 간다. 더 이상 가난한 아이들이 중산층 및 상류계층으로 수직 이동하는 것은 고도성장기의 신화로 치부되며, 부의 세습이 고착화되면서 新신분사회로 변해가고 있다. 더 이상 ‘공부’가 계층이동의 수단이 되질 못한다. 어릴 적부터 사교육으로 무장된 아이들을 빈곤한 가정의 아이들의 따라가질 못하기 때문이다. 

 

부의 양극화가 미래에 가져올 재앙이 눈에 보이듯 선하다. 가난을 벗어날 길을 박탈당한 아이들의 분노를 우리사회는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두렵다. 특히 이 아이들 중에는 동남아시아인의 피가 섞인 ‘코시안’들도 있다. 철저한 경쟁사회인 대한민국에서 원초적으로 경쟁력을 상실한(부모의 경제력과 사회적 위치로 인해…) 코시안들은 아마도 20~30년 뒤에는 정치적 불안 세력으로 성장할 것이다.  

 

가난 때문에 잃어버린 어린 시절을 우리사회는 무엇으로 보상해주어야 하는가? 떠오른다. 가난으로 분노했고, 좌절했으며, 비참했던 그 기억들이. 그래도 그나마 신앙과 상상력(꿈), 변화를 바라는 열정이 그때의 나를 지켜주었다. 요즘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은 무엇으로 스스로를 보호하며 미래를 꿈꿀지 궁금해진다. 

 

인생은 만남이다. 마케팅과 세일즈 컨설팅 회사인 ‘페라지그린라이트’의 창설자이자 CEO인 키이스 페라지는 작은 탄광촌의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난했기에 어린 시절부터 무거운 골프가방을 메고 골프장에서 캐디노릇을 했던 그는 그곳에서 만남과 관계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무거운 가방을 메고 장거리 골프코스를 따라다니며 나는 우리 부모님은 평생 만나보지 못했을 사람들이 서로 돕고 생존하는 방식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서로 일자리를 소개해주고,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에 시간과 돈을 투자했으며, 자식들을 일류 학교에 보내 일류 경험을 하고 일류 직장에 들어갈 수 있도록 뒷받침했다. 나는 성공이 대물림되고 부자가 더 큰 부자가 되는 증거를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친구와 인맥으로 형성된 그물망이 그들이 가진 막강한 특권의 원천이었다. 가난은 물질적으로 부족하다는 의미일 뿐 아니라, ‘나를 더 낫게 만들어줄 수 있는 사람들’로부터 격리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혼자 밥먹지 마라’ 중에서)  

 

그의 말을 읽으면서 나에게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이유 없는 두려움이 아니었다. 비빌 언덕이 없는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의 미래가 눈앞에서 그려졌기 때문이다. 대물림된 빈곤은 또다시 그 아이들의 아이들에게 대물림되는 디스토피아적인 미래가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다. 

 

절망하지 말자. 과거가 미래를 지배하지 않는다는 믿음으로 세상과 만나자. 그러기 위해서 혼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중요하다. 특히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일수록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십시일반으로 모이면 키다리아저씨가 우리를 도와 줄 것이다. 하늘이 두 쪽 나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이다.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에게 키다리아저씨들을 소개시켜주자. 그 아이들에게 부족했던 것은 물질적인 모자람이 아니라 ‘나를 더 낫게 만들어줄 수 있는 사람들’의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를 더 낫게 만들어줄 수 있는 사람들’을 아이들에게 채워주자. 

 

나는 이를 ‘키다리아저씨 프로젝트’라고 부르려한다. 빈곤가정의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것도 의미가 있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도 의미가 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것은 그 아이들에게 ‘나를 더 낫게 만들어줄 수 있는 사람들’과 만남을 연결해주고 관계를 지속시켜주는 것이다. 혼자서 크는 법은 없기 때문에…. 

 

 

※ 예전 홈페이지에 있던 글을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