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녀와 나무꾼 [예전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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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과미래 16-07-13 11:49본문
‘선녀와 나무꾼’이라는 옛 동화는 우리에게 너무 친근하다. 잠깐, 옛 추억에 잠겨보자.
“사냥꾼에게 쫓기는 노루가 나무꾼에게 살려주기를 부탁했다. 마음씨 착한 나무꾼은 노루를 나뭇짐 뒤에 숨겨주었다. 얼마 되지 않아 사냥꾼이 숨을 헐떡거리며 달려와 노루가 어느 쪽으로 달아났느냐고 물었다. 죽음의 위기에 처한 노루를 살려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나무꾼은 저쪽으로 도망갔다고 하며 옆길을 가리켰다. 사냥꾼은 나무꾼이 가르쳐 준 옆길로 서둘러 달려갔다.”
생명을 건진 노루는 사냥꾼에게 선녀를 배우자로 맞이하게 해주는 보은을 한다. 어릴 적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무꾼처럼 약하고 가여운 약자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배웠다. 당연히 약한 생명인 노루를 사냥꾼으로부터 숨겨준 나무꾼의 선행을 칭찬해야 한다고 배웠고, 본받아야 한다고 배웠다.
나무꾼은 착한 마음씨를 지닌 소박한 사람이며, 노루는 숲 속의 약자로서 생명을 지키기 위해 도망치는 가련한 생명이다. 무서운 사냥꾼에게 노루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숨겨주고, 거짓말했던 나무꾼의 행동은 커다란 용기가 필요했다. 때와 장소에 따라 대응하고 처리하는 방법이 변화하는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 전래동화의 교훈을 동의할 수 없었다. 어릴 적이지만 색다른 상상을 했던 기억이 있었다.
“만약 사냥꾼이 무서운 살인마라면 나무꾼은 행동을 진정 올바르다고 할 수 있을까?”
어렸기 때문에 그 때에는 스스로의 물음에 대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 나이를 먹고 먹은 다음에 어린 시절의 물음에 대한 답을 간신히 하게 됐다.
첫째, 노루를 구하기 위해서 사냥꾼에게 거짓말을 한 나무꾼의 행위를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아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 거짓말하는 것을 너무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문제의식의 빈곤과 안일함을 우리는 꿰뚫어 봐야 한다.
둘째, 만약 나무꾼의 행위(거짓말)가 옳다면 '정의(생명)를 위해서 소수(진실)가 희생당하는 것'조차도 당연하다고 우리는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게 아닐까.
셋째, 나뭇짐에 숨은 노루는 나무꾼의 거짓말로 인해 생명을 지킬 수 있었지만, 살인욕구에 휩싸인 사냥꾼은 분명 다른 노루 등의 생명을 사냥할 것은 당연하다. 문제의 핵심은 한 마리의 노루를 살리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죽일 대상을 찾아 광분하는 사냥꾼의 전도된 사고와 살생욕구에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점이다.
넷째, 그렇다면 나무꾼의 거짓말은 궁극적으로 노루라는 한 생명을 구할 수는 있었지만 사냥이라는 생명파괴의 행위를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다시 말해 생명의 존엄과 질서를 지키지는 못했다. 핵심을 직시하는 문제의식의 눈을 갖지 못하므로 인하여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하지 않은 결과, 쫓고 쫓기는 악순환은 영원히 되풀이 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다섯째, 여기서 나무꾼이 사냥꾼에게 한 거짓말은 현실의 모순과 고통을 회피하는 방편이었을 뿐이다. 나무꾼이 생명의 존엄과 질서를 좀 더 깊이 생각하고 몸으로 체득하였다면 생명의 질서를 거슬리는 사냥꾼에게 진실이라는 방편으로 당당히 맞서 생명의 존엄과 질서를 깨닫게 해주었어야 한다.
참된 생명은 바로 진실이다. 생명과 진실은 하나인 만큼 가치의 우열이 있을 수 없다. 아무리 좋은 의도의 어떤 형태의 거짓말도 생명의 참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다. 더디더라도 '진실'만이 생명의 참된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는 것이다.
※ 예전 홈페이지에 있던 글을 옮겼습니다.